공지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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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미래를 열어가는 힘! 제주흥사단입니다.

 
작성일 : 19-10-07 22:12
임시정부 100주년 기념 중국 탐방기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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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따라서 답사 후기

 

 

오랜 기간을 준비해왔던 중국 답사가 마침내 실현되었다. 해외 답사가 어려운 일은 중간에 참가자가 자주 변하는 점인데,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45일의 일정을 시작하였다. 동방항공을 그것도 제주에서 출발하는 항공편을 이용하게 되어 인천공항으로 날아가서 다시 항공편을 갈아타고 해외로 가는 불편이 없어진 것이 알찬 일정을 보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시간을 절약하게 된 것은 말할 나위도 없고 말이다. 흥사단 본부에서는 중국에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서 탐방한 경우가 많았지만 제주지부 입장에서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과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제주흥사단으로서도 도산 안창호 선생이 활동하였던 임시정부를 찾아 답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30여명이 넘는 인원으로 진행되어갔으나 최종 확정된 인원은 26명이 되었다. 흥사단 단우 뿐만이 아니라 가족, 친구, 제주문화유산답사회 회원, 제주문화관광해설사 등 흥사단의 목적과 취지를 잘 이해하는 일반 시민도 동참하여 정예 탐방요원이 결성되었다. 제주공항에서 상해 푸동공항까지 1시간 10분 정도 소요되었지만 이곳에 오기까지는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오랜 시간이 걸렸던 만큼 많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고난과 역경을 가슴에 담고 나라를 잃었던 설움을 다시는 느끼지 않기를 비행기 안에서부터 바래본다.

 

일정표에는 기내식을 제공한다고 안내가 되었다. 1130분에 제주공항에 도착하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모두들 점심을 거르고 기내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행시간이 1시간 10분이기 때문에 안전고도에 이르면 바로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안전고도에 이르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푸동공항에 도착하니 안전벨트를 매라고 기내방송이 나왔다. 우리 일행은 웅성거렸다. 기내식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웬걸 곧 도착한다니 부풀은 기대심은 여지없이 깨지고 허기가 더욱 빨리 찾아오기만 했다.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면 기내식을 제공하는 반면 제주공항에서 출발하는 경우에는 비행시간이 짧아 제공하지 않는 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푸동공항에도착하지 마자 샌드위치와 아주 커다란 요구르트로 점심을 간단히 해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점심식사를 하기에는 여건상 애매하고 예정된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불가능하였다.

 

예정된 일정 중에서 첫 번째는 외탄(外灘) 황포탄의거(黃浦灘義擧) 현장이다. 상해의 상징인 황포강을 따라 약 1.5km 강둑에 100여년 전의 건물들과 반대편에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하게 늘어섰다. 1840년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이 개방된 이후 외탄 일대는 외국의 조계가 되어 영국, 일본, 미국, 프랑스 등 열강의 각종 건물이 들어섰다. 세계건축박물관이라고도 불리는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곳이다. 밤이 되면 화려한 조명이 유럽의 어느 도시에 있는 듯한 착각을 들게 한다. 동방명주탑의 불빛이 외탄을 더욱 밝혀 주고 있지만 이 일대에서 항일의거가 있었다. 의열단(義烈團)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가 상하이에 도착한다는 정보는 입수하고 1922328일 김익상(金益相)과 이종암(李種巖)이 단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체포되어 옥중 순국하고 말았다. 외탄 지역에 명멸하는 수많은 불빛은 의거 열사의 불빛일 것이다. 의거가 있었던 현장이 정확히 어느 지점인지 명확하지도 않은 실정이다. 그러하기에 외탄 양쪽에 들어선 건물에서 비추는 화려한 불빛을 보고자 다녀가는 사람들이 이름없이 스러져간 열사의 불빛을 과연 몇 명이나 보고 가는지 답답하기만 하였다.

 

상해(上海)는 장강(長江) 아귀에 있는 인구 2,000만명이 넘는 메가시티(Magacity)이다. 가이드가 상해와 중국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춘추시대에는 오나라 영토였으나 월나라 땅, 다시 초나라로 바뀌었던 과정을 맛깔나고 지루하지 않게 설명하였다. 한편으로는 3.1 운동 이후 망명정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410일 조직되었다. 19196월 내무총장으로 도산 안창호 선생이 취임하여 교통국과 연통제를 조직하고 기관지 독립신문 발행과 각종 외교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1923년 국민대표회가 결렬되고 난 이후에는 급속히 세력이 약화되어 19325월까지 상하이에서 활동했다. 서구 열강들이 들어선 상하이 지역이야 말로 일제 강점의 부당함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독립운동 활동에는 최적의 도시였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임시정부가 이동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지름길이다. 푸동공항에서 제주공항으로 돌아가는 일정이기 때문에 마지막 날은 상하이로 다시 돌아오는 일정이다. 따라서 상하이에서 숙박하기 보다는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적정한 장소로 이동하였다. 당송 문화의 중심지인 소주(蘇州)로 약 2시간 이동하여 호텔에 투숙하였다.

 

()나라 수도였던 소주는 수로와 운하가 발달해 물의 도시로써 번성하였다. 하늘에는 천당,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고 했을 만큼 살기 좋은 곳으로 유명하여 예부터 문물이 번성하였다. 크고 작은 원림(園林)이 있는 것도 소주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유원(留園)은 청()나라 서시태(徐時泰)1525년 지었고, 1794년 유서(劉恕)가 새 주인이 되면서 유원(劉園)으로 변경되었고, 19세기 말 징원을 증축하고 보수하면서 천지간에 오래 머물게 만드는(長留天地間) 정원이라는 의미로써 지금의 유원(留園)으로 바뀌었다. 졸정원(拙政園), 창랑정(滄浪亭), 사자림(獅子林)과 함께 소주의 4대 정원으로 꼽힌다. 유원은 태호석(太湖石)으로 유명하다. 바위에다가 모양이나 글씨를 새겨서 강에 30년 이상을 잠겨 놓으면 물에 침식되어 기기묘묘한 형상의 돌로 다시 탄생되면 이것을 건져 올려 정원에 장식물로 조경을 멋있게 꾸미는 일이 당시에는 유행이었다고 한다. 제주의 기묘한 화산석에 비하면 보잘 것 없게 보이지만 커다란 태호석과 각종 누각과 정자와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있다. 황실의 정원이 아닌 개인의 정원 면적이 넓은 중국이라는 점을 감안한다 손 치더라도 과도하게 큰 규모이다.

 

사찰의 종소리에 나그네의 시름을 담아 읊었던 풍교야박(楓橋夜迫)으로 유명해진 한산사(寒山寺) 또한 소주의 명소이다. 풍교야박은 당나라의 시인 장계(張繼)가 배를 타고 가다 날이 저물어 풍교의 강가에 배를 대고 밤을 보내며 지은 시이다.

月落烏啼霜滿天(월락오제상만천) 달 지고 까마귀 울고 하늘엔 서리 가득한데

江楓漁火對愁眠(강풍어화대수면) 강가 단풍나무, 고깃배 등불 마주하고 시름 속에 잠 못 이루네

姑蘇城外寒山寺(고소성외한산사) 고소성 밖 한산사

夜半鐘聲到客船(야반종성도객선) 한밤중 종소리가 객선까지 들려온다

 

56세의 늦은 나이에 세 번째 과거에도 낙방하여 집으로 돌아가던 장계. 언제 다시 과거를 볼 수나 있을까? 무슨 낯으로 식구를 대할까? 한 달 이상 걸려 고항집으로 돌아가는 처량한 신세. 배를 타고 풍교에 이르자 늦은 가을 서리 맞은 단풍과 불어오는 바람은 마음을 더욱 수심에 차게 하는데 뎅~ ~ 종소리가 울려오니 더욱 가슴이 아리는 절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당나라 현종 시기에는 안록산(安祿山)의 난으로 정국이 크게 혼란하였다. 수도 장안(長安)의 관료와 권력자는 이미 시제를 빼돌리고 부와 권력을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데 변방의 보잘 것 없는 장계에게는 분노할 힘도 원망할 대상도 없었다. 그 때 들려오는 종소리. 종소리를 듣는 순간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유일한 믿음이 있을 뿐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는 절절한 심경을 함축하여 전대미문의 명시가 되었을 것 이다.

 

지금 한산사는 유명인사가 방문하여 쓴 풍교야박 시를 각자의 멋을 부려 쓴 서예전시장이 되었다. 또한 종소리를 듣고자 초하루와 보름에 찾아오는 신자와 방문객으로 인산인해를 이룬다고 한다.

 

소주의 또 하나의 상징인 호구(虎丘, 후치우)로 향한다. 원래는 해용산(海涌山)이었는데, 호랑이가 웅크려 앉아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해서 호구라고 하며, 춘추전국시대 오왕인 합려(闔閭)가 이 곳 연못 아래에 묻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합려의 무덤을 만들 때 관 속에 보검 3000자루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전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이 보검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보는 앞에서 발굴토록 했다. 그런데 갑자기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왔고, 결국 발굴이 중단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발굴을 자처하는 자가 많지만 발굴기술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중국 정부에서 허락하지 않고 있는 수수께끼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보검이 묻혀있다는 곳은 연못이 되었고, 후세사람들은 이 연못을 검지(劍池)라고 부르고 있다. 40여 미터 언덕 정상에는 호구탑이 있는데, 높이가 47.5m이며 수나라 때 지어진 탑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화재가 발생하여 목조로 겉을 장식하였던 부분은 소실되고 골격만 남아 있던 것을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나 북쪽으로 약 5도 기울어져 있는 모습이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과 닮았다고 하여 동양의 피사탑이라고도 불린다.

 

정문을 들어서면 왼편으로 처음 보이는 마른 우물이 있다. ()나라의 고승인 감감이 목이 말라 맨손으로 팠다는 샘,“지성이면 감천이다라는 속담이 만들어졌다는 감감천(憨憨泉), 손오공이 복숭아를 물고가다 떨어진 복숭아가 바위로 변했다는 석도(石桃), 오왕 합려가 보검을 시험해 보기 위해 단칼에 베어낸 듯 가운데가 곧게 갈라져 있는 시검석(試劍石), 신선놀음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속담이 유래된 두 신선이 놀았다던 이선정(二仙亭)을 보고는 생각의 크기에 놀랐다. 당대(唐代) 명기, 진랑(真娘)이 사대부의 희롱을 피해 자결했다고 전해지는 진랑의 묘에서는 아련함을 느끼고, 부차가 아버지의 무덤을 만든 후 그 위치를 비밀로 하고자 1,000명의 인부를 모두 독살하여 너럭바위 곳곳에 붉은 기운이 지금도 얼핏얼핏 서려 있다는 천인석(千人石)에 이르러서는 몸서리가 쳐졌다.

 

호구검지 위쪽으로 설치된 쌍정교(雙井橋)에 뚫려있는 두 개의 구멍, 서시가 다리 위에서 검지를 내려다보는 행동이 위태롭기 그지없어 쌍정(雙井)만들고 둘이 한가롭게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는 아주 닭살 돋는 일화에서는 한편으로는 부차가 서시에 빠져 헤어날 줄 모르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어 결국은 월나라에게 패망했다는 점, 다른 한편으로는 부차의 서시에 대한 무한정의 사랑을 동시에 느낀다. 이러한 일화 이외에도 오왕 부차(夫差)와 서시(西施)와 관련된 사건이 소주 전역을 세계적인 문화관광의 도시로 만들고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물며 조선 숙종 291121(임술)의 상황을 기록한 숙종실록에서도 서시를 언급한 대목이 나온다.“더욱이 한 때 임용된 인물이 어찌 모두 군자이겠으며, 버려져서 쓰이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모두 소인이겠습니까? 때를 만나면 얼굴이 못생긴 여자도 서시가 될 수 있고, 때를 잃으면 천리마도 둔한 말보다 못한 것입니다.(況一時向用者 豈盡君子 廢棄者 豈盡小人 遇時 則無鹽可爲西施 失時則騏驥不如駑駘)”라고 하였다. 인재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소주에서 가이드가 재미있게 설명한 서시의 일화를 도산 안창호 선생이 청년 인재의 양성을 위하여 설립된 흥사단의 설립취지와 연결시킨다면 이는 결코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되고 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냥 지나칠 수만은 없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전역을 떠돌며 투쟁했던 활동이 너무나 묻혀있어 안타까운 마음이다. 앞으로 2,500년이 지나서도 부차와 서시의 일화만큼이나 임정의 활동이 세계를 무대로 전개되었고, 독립의 발판이 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이 일제에 압제되었던 그 국가에게 만이라도 각인되기를 호구탑에서 절실하게 바래본다.

 

국토 면적이 넓어 이동한다면 먼저 걱정이 앞선다. 몇 시간을 달려야 하는 것 인가? 아니 며칠이 걸리지는 않을까? 마음이 준비를 먼저 한다. 소주에서 남경까지는 약 3시간 고속도로를 달려야 한다. 대한민국인으로서 일본을 증오하듯이 남경대학살의 참상을 경험한 중국인으로서는 참상을 넘어서 악몽이었던 남경을 향해서 가야 한다.

 

두려운 마음은 이젠 거리가 멀어서가 아니다. 역사란 무엇이고 왜 알아야 할까? 순환론적, 유물, 관념, 실증 문명사관 등 여러 사관이 있지만, 랑케(Ranke)가 주장한 그대로의 과거도 중요하고, 아놀드 조셉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가 탄생, 성장, 붕괴, 쇠퇴의 과정을 거치는 도전과 응전도 있었다. 그러나 남경의 대학살은 양쪽이 아니라 랑케의 말처럼 있는 그대로만 보아도 도살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최소한의 자존심은 커녕 능멸, 모멸을 지나 민족을 말살하려는 발걸음이었다. 일본은 칼을 갈아 버젓이 인간의 목덜미를 치고 말았다. 잘린 머리는 엄연하게 고속도로 위에 깔려 있었기에 보는 사람이 치를 떨고 눈물을 흘려도 그 진실의 역사는 여전히 남았다. 모두가 그것을 안다.

 

일찍 출발한 보람이 있는지 어두워지기 전에 난경에 도착하였다. 도로변에는 모두가 예상치 못하고 놀라운 광경이 있었다.